봄 또다시 봄

어느새 딸래미가 대학을 갔다....
"딸램 기분이 어때." 하고 물어봤다..
"글쎄...별로 아무 생각 없는데.." 심드렁한 말투, 하긴 평상시에도 시크한 넘이었지..ㅎㅎ
아빠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너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날들이 될거야...
너의 인생에 두고 두고 생각날 몇번의 아름다운 추억중에 한번이 될거야...넌 지금은 잘모르겠지만.

첫 대학 캠퍼스의 봄날, 바람이 살랑이던 오후였다. 
강의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낯선 향기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꽃향기도, 향수도 아닌 묘하게 매혹적인 그 향기는 나의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멈추게 했다. 
그 향기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우연히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긴 생머리를 한 여학생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고, 나는 갑작스러운 심장의 두근거림에 얼굴이 붉어졌다. 


신입생 환영회가 끝난 뒤, 새로운 캠퍼스 생활에 설레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학과 건물 앞을 지나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다시, 그 낯설고도 익숙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내게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학과 사무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신입생인가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당황했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ㅎㅎ 여전히 지금도 용기없는 넘)
"저도요. 오리엔테이션 때 봤던 것 같아요. 제 이름은 은경이에요."




그렇게 우리의 첫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은경.  맑고 지혜로운 눈빛을 가진 그녀였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같은 수업을 듣게 되면서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고, 캠퍼스 카페에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항상 그녀 주변에는 그 특별한 향기가 맴돌았다.

"은경아, 네가 쓰는 향수 이름이 뭐야? 항상 좋은 향기가 나서."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향수는 아니야. 그냥 내 향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에는 그저 겸손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향기의 비밀이 조금씩 드러났다. 
그것은 단순한 향수의 향기가 아니라, 그녀의 삶이 만들어낸 특별한 향기였다.

은경이는 책을 좋아했다. 
오래된 서점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책 사이에서 지식을 흡수했다. 
그녀의 방은 책으로 가득했고, 종이와 잉크의 묵은 향이 그녀의 옷에 배어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차를 즐겨 마셨다.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에게 배운 차 문화는 그녀의 일상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얼그레이, 다즐링, 재스민, 페퍼민트... 다양한 차의 향기가 그녀의 숨결에 묻어났다.

"지난 여름, 유럽 여행을 다녀왔어."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가 말했다. 
프랑스 파리의 세느강변에서 읽은 책, 이탈리아 피렌체의 작은 서점에서 발견한 시집, 영국 코츠월드의 라벤더 밭에서 보낸 오후.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내 마음속에 그림을 그려냈다.

"라벤더 밭에 누워있으니까,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 하늘은 너무 파랗고, 라벤더 향기는 너무 짙어서... 정말 꿈같았어."

그녀의 말에 나는 불현듯 너무 먼 괴리감을 느꼈다...유럽..흠..

지현이의 매력은 그녀의 향기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박식함은 늘 나를 놀라게 했다. 
러시아 문학부터 프랑스 철학, 동양의 고전까지, 그녀의 지식은 광범위했다. 
세미나 시간에 그녀가 발표할 때면, 교수님조차 감탄하곤 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의 심리적 변화는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계급 갈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겨울이 오고, 우리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던 시간은 자연스럽게 데이트로 이어졌다. 
첫 눈이 내리던 날, 캠퍼스 산책로를 걸으며 우리는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온기는 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오늘따라 네 향기가 더 짙은 것 같아."
내 말에 그녀는 살짝 미소지었다.

"오늘 특별히 좋아하는 차를 마셨거든. 윈터 스파이스라고, 계피와 정향, 오렌지 껍질이 들어간 차야."

그 날의 키스는 달콤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윈터 스파이스의 향이 났고, 그 향기는 내 기억 속에 깊이 새겨졌다.

봄이 오고, 캠퍼스는 다시 꽃으로 가득 찼다. 
우리의 사랑도 그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났다. 
함께 보낸 시간들, 나눈 대화들, 공유한 꿈들...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그리고 항상 그녀의 향기가 우리 사이에 맴돌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나는 군 입대 통지서를 받았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현실이 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은경이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강변을 걸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다릴게."

그녀의 약속은 간단했지만, 그 말 속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고, 그녀의 향기는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느껴졌다.

입대 전날 밤, 우리는 캠퍼스의 작은 언덕에 앉아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 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만날 날에 대한 이야기.

"돌아오면 같이 유럽 여행 가자. 내가 다녔던 모든 곳을 함께 가보고 싶어."

그녀의 제안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약속이자 희망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잔인했다. 
군대에서의 일상은 예상보다 더 힘들었고, 외부와의 연락은 제한적이었다. 
처음에는 자주 오던 그녀의 편지가 점점 줄어들었다.
 마지막 편지에서 그녀는 유학을 결정했다고 했다. 프랑스 파리의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 기뻐해주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그녀의 꿈을 응원하면서도, 우리 사이의 거리가 더욱 멀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두려웠다. 
편지 속에서도 그녀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향기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제대 후, 나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 
캠퍼스는 여전히 같은 모습이었지만,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그녀가 없는 캠퍼스는 색이 바랜 사진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함께 앉았던 벤치, 도서관의 구석 자리, 첫 키스를 나눈 산책로... 모든 곳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았지만, 그녀의 향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그녀에 대한 소식을 가끔 들을 수 있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파리의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소식.

어느 가을날, 우연히 서점에서 그녀의 첫 번째 책을 발견했다. "향기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이었다. 손떨리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고, 그 안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발견했다. 그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의 첫 만남, 함께 보낸 시간들, 그리고 이별의 순간까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향기는 사라지지만, 기억은 남는다."

책을 덮으며,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희미하게 그녀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라벤더와 책의 향, 차와 여행의 향이 섞인 그 특별한 향기. 아마도 그것은 실제 향기가 아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녀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 거리를 걷다가 누군가에게서 비슷한 향기가 느껴질 때면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그녀는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다시 대학 캠퍼스의 봄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첫사랑의 향기는 그렇게 내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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