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며

철길 옆 개나리꽃이 노란 숨결을 내뿜던 날, 낯선 여행객이 내 어깨에 묻은 벚꽃잎을 털어주었다. 
손짓 하나로 시작된 우연한 대화는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짧았지만, 그 순간의 온기는 아직도 손끝에 남아있다. 

인연이란 이름표를 단 수많은 만남들이 기차역 플랫폼을 오가듯 스쳐 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관계들.....
언젠가 비로소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품고 있음을 깨닫게 되지만.....

봄은 만남의 계절이자 이별의 철이다. 

새싹처럼 터져 나오는 감정들이 서로의 공기를 나누며 자라날 것만 같았던 순간들도, 어느새 무성한 녹음으로 하늘을 가리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교정에서 주웠던 단풍잎 책갈피를 아직도 소장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 
가끔 가을이면 우표 한 장 크기의 편지를 보내오는 그와 나는 서른 해가 넘도록 계절의 변화를 주고받으며, 단 한 번도 같은 공간을 공유하지 않았다. 
종이 위에 맺힌 안부의 이슬만으로도 우리의 뿌리는 계속해서 땅속 깊이 뻗어나가고 있다.

여름 휴가철 해변에서 본 어부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물을 함께 끌던 두 사내는 서로 다른 리듬으로 손잡이를 당기고 있었지만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알았다. 
한쪽이 넘어질 듯 흔들릴 때마다 다른 쪽이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마치 오래된 춤사위 같았다.
 

옆집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매일 아침 호박잎 돌보듯 다투는 소리도 이제는 이 동네를 깨우는 종소리처럼 익숙하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오랜 시간 쌓인 막간의 쉼표들이 번갈아 가며 쉼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공원에서  빵조각을 던지는 할머니를 보면 철새들이 그녀의 손짓을 알아듣는 것 같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곳에 앉아 계절을 기다리는 이들의 암호가 생겼다. 
새들은 부리를 숙일 때마다 할머니의 눈가주름에 새겨진 시간들을 한 조각씩 물어간다. 
서로 다른 종(種)이 만든 이 조용한 동맹은, 말없이 흘러가는 정오의 햇살 속에서 완성되는 무언의 합주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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